내가 끝을 다 보지 못한 소설은 많지 않을 뿐더러, 끝을 바라는 소설도 많지 않았다. 내가 바랐으나 보지 못했던 '끝'과, 그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볼 수밖에 없었던 '끝'을 적어내려가고자 한다.

끝의 이름은 여러가지다. 종말, 결론, 종장, 최종... 사랑의 측면에서 바라본대도 그것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별, 헤어짐, 실연, 마무리... 끝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끝을 싫어하는 많은 이유들에는 그 뒷장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게 큰 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의 여러 서점을 돌다가, 마지막에 방문한 서점에서 폐점 시간을 1시간 반 즈음 남겨두고 읽을 책을 고르고 고르다 만나게 된 책이다.「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이라는, 제목이 뜻하는 바와는 어울리지 않는 폰트와 사과가 그려진 검은 배경의 표지가 주는 이질감에 끌려 선택하게 되었고, 어린이 도서를 읽는 키즈존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순적인 게 신기할 정도다.) 표지와는 또 다르게, 문체는 잔잔했고 이야기의 전개도 평화롭다면 평화로웠다.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평화로울 수 없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책은 사강, 지훈, 현정, 미도를 중심으로 개개인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쓰여진다. 현정과 이별한 지훈, 누군가와 이별한 사강은 우연히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은 미도를 만나고, 레스토랑의 주인장이 준비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레시피'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 그리고 '실연의 기념품'을 마주하게 된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中에서 -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이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거절과 거부가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어느 날, 사강의 무릎 위에 이렇듯 뜨거운 물이 가득 든 주전자가 엎어졌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역시 몸 이곳저곳이 장마의 벽지같이 벗겨져 너덜너덜해졌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없이 손톱을 뜯거나, 의자에 앉아 눈물을 흘리거나, 참가비를 십만 원이나 내고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강은 이 얼굴들 모두를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흩어져 앉아 시선을 피하고 있던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얼굴들까지도.
사강은 이들을 '오전 일곱 시의 유령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中에서 -
실연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써, 책을 읽던 중 위 문단들에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누구든 한 번쯤 겪은 경험이라서 그런지, 책 한줄한줄을 읽는데 잔잔함이 묻어있음에도 지루함은 없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들어있는 반전 역시 제 몫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분명 앞서 방문했던 서점에서 다른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 책의 제목도, 줄거리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이 내게 주는 파급력은 꽤나 컸다. 글 한 줄 한 줄을 곱씹으며 읽도록 만들었다. 결말을 궁금해 했던 것도, 책을 떠올렸을 때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수놓아지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인지 모르게 '낭만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실연에 제각기 아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낭만적으로 꾸며낸, 아픔 속에서도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한데 묶어놓았다. 현정과 지훈, 사강의 눈물은 이야기가 되었고 자신의 슬픔으로 다른 이들을 위로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 역시 그랬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끝을 이야기한 이들은 서로에게 깊이 공감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이겨냈다. 이야기의 끝을 보지 못해 확단할 순 없지만, 나는 이 이야기의 끝이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이 모임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라는 말을 조금 뒤틀어 곡해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슬픔은 나누면 반이다'라는 말을 굳게 믿는다.
친한 동생이 추천해줘 읽었던 유명한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인 김독자는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이라는 소설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던 중, 실제로 그 소설이 현실이 된다. 늘 소설과 함께 했던 덕에 각 시나리오(게임의 스테이지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듯하다.)를 어렵지 않게 클리어해 나간다. 그렇지만 그는 모두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내려간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의 종장. 그 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전지적 독자 시점」에서는 끝을 ■ ■이라고 표현한다. 우습게도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역시 끝까지 읽지 못하였다. (전혀 다른 두 소설을 연관짓는 것은 오랜만이다. 사실 두 소설은 전혀 반대의 성향을 가진다. 단지 이야기의 '종장'이 등장한다, 공통점은 그뿐이다. 물론 그 공통점이 가장 핵심적이긴 하다.)
서로 다른 끝을 이야기하고, 한 쪽은 끝을 바라고 다른 한 쪽은 끝을 바라지 않는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에서는 그 끝을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나는 둘중에 굳이 고르라 하면 「전지적 독자 시점」의 끝이 더 마음에 든다. 끝이라고 해서 정말 끝이냐고 묻는다면 그게 아닌 것. 사실 실연이 힘들다고 하지만 실연을 겪는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세상을 끝내고 싶을 뿐. 누군가는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 말한다. 실연한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걸. F가 실연당한 사람에게 꺼내어 놓는 T적 위로다.
모순적이게도 끝을 이야기하는 책이었으나 서점 마감시간이 다 되어 끝을 보지 못하고 나왔다. 마지막이 궁금한 책은 오랜만이었다. 결국 내일도 서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덕분이다.
덧붙이는 말.
이 책의 작가,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라는 유명한 에세이의 작가였다. 조금은 놀랐다. 보통 같은 작가가 저술한 책이면 이야기의 서술 방식이라던가 문체에서 주는 느낌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이미 두 책을 모두 읽어봤지만, 각 책에게서 받았던 느낌의 결은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라고 부를 수밖에 없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 책을 읽고 드는 생각들을 닥치는 대로 적는 게 좋다. 머릿속에 있는 좋은 생각들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달아나버려서, 그것들의 그림자라도 적어두고자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근데 그들을 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만 멈칫거려도 형태가 변해버려서 아쉽다. 생각나는 걸 바로바로 적을 수 있는 타자 실력과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둘 성실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낀다. 이 전에 쓴 글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할 어휘력이 되지 않아 답답하다고 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답답한 마음이 왜인지 덜하다. 아마 그냥 이 글이 마음에 들어서기 때문인 것 같다.
올드팝을 들으면 글이 잘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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